영화 리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3)

용재 2021. 12. 3. 23:51

사실 나는 멜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보고 나서 여운이 남고,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멜로 영화들은 제대로 된 주제도 없이 보면서 대리 설렘을 느끼는 게 전부이고, 보고 나서 남는 게 없는 영화들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보면서 내가 멜로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가 별로인 멜로 영화들만 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멜로 영화이면서도 좋은 주제를 가지고 여운을 남기는 영화들이 많았다. 오늘 리뷰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멜로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꾼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줄거리

남자 주인공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마작 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우연찮은 계기로 여자 주인공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난다. 조제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며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츠네오는 우연히 조제가 해준 요리를 먹고 조제의 요리실력에 감탄하며, 이후 밥을 얻어먹으러 조제의 집에 여러 번 방문하게 된다.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 가까워지며 호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 집에 찾아오지 말라는 할머니의 경고로 츠네오는 더 이상 조제를 볼 수 없게 되고, 조제를 잊으려 한다. 그러던 중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츠네오는 홀로 생활하고 있을 조제에게 한달음에 달려가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연인이 된다.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조제가 남자 친구가 생기면 보고 싶다던 무서운 호랑이를 보러 동물원에도 가고 추억을 쌓으며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다. 츠네오는 조제를 부모님께 소개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을 먹는 순간 츠네오는 현실을 마주하고 그 순간부터 조제에 대한 생각과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츠네오는 그걸 말하지 않았지만 조제는 이미 그 사실을 눈치챈다. 둘은 바다로 여행을 가고, 조개껍데기와 천장에는 물고기 조명이 흐르는 호텔에 머문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담담하게 헤어진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

"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

영화 속에서 조제가 읽어주는 프랑수와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의 한 대목이다. 영화에서는 잠시 조제의 내레이션으로 나오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랑과 이별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멜로 영화는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래서 이별은 절절하게 표현된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일시적이다. 모두가 지금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사랑은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조제는 사랑이 유한하다는 것, 지금 우리가 가진 감정이 모두 변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는 마음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조제와 츠네오의 이별도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제목의 의미

영화 초반부의 조제는 유모차를 타고 다니며, 얼굴을 모두 가리고 다녔다. 세상을 접해본 적이 없기에 세상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식칼을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위협했다. 조제의 말마따나 '깊은 바다 밑을 구르던' 시기이다. 그랬던 조제가 츠네오를 만나고 점점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츠네오와 사랑하게 되면서 조제는 가장 무서워하던 호랑이를 보러 가며 두려움을 극복한다. 제목의 호랑이는 조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임과 동시에 조제의 성장을 상징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조제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혼자 장을 보러 다녀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영화 초반부 유모차 속에 숨어있던 조제의 모습과 대비되며 조제의 성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고기는 과거의 조제이다. 세상과 단절되어 깊은 바닷속, 즉 집 안 자신의 작은 방에서만 살아가던 자기 자신이다. 물고기는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쳐 올라올 수 있는 존재이다. 물고기처럼 조제는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쳐 올라와 세상과 마주한다. 

결국 제목의 호랑이와 물고기는 모두 조제의 성장, 변화를 상징하는 소재들이다.

 

 


장애를 대하는 영화의 태도

영화를 보고 난 후 새삼 놀랐던 것이 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조제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장애인의 삶을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비장애인들에게 당연한 일을 힘겹게 해내는 장애인들의 현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 당연하게도 등장인물의 장애에 계속해서 신경을 쓰게 되고, 그 인물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영화에서 조제의 장애는 조제라는 캐릭터가 지닌 여러 가지 특징 중 하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특징이 조제가 츠네오에게 요리를 해주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조제는 요리를 할 때 높은 의자에 올라가서 요리를 하고, 내려올 때면 의자에서 뛰어내려서 바닥에 떨어진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방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조제는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조제의 요리 실력은 훌륭하다. 조제의 요리는 초반에 츠네오가 계속해서 조제를 찾아오게 되는 동기가 되며, 츠네오에게 매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과정에서 츠네오는 조제에게 동정심이 아닌 호기심, 이성적 관심을 가지게 된다. 조제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인 것이다.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장애 그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장애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하고 장애와는 무관하게 주인공의 특징과 매력을 표현하는 것에서 장애를 대하는 이 영화의 태도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뷰를 마치며

이전에 썼던 리뷰들과는 달리, 쓰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쓰기 시작한 날부터 일주일은 걸린 것 같다. 왜 그랬나 생각해보면 시작해놓고 손을 안 댄 날도 있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걸 표현하는 게 참 어려웠다. 다른 리뷰를 쓸 때도 물론 그렇지만, 이번에 특히 심했다. 영화를 보고 느낀 게 참 많았는데, 정리도 잘 안되고 글로 쓰자니 잘 표현이 안돼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다른 리뷰들을 많이 찾아보면서 생각 정리를 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느낀 점들이 잘 표현된 것 같다. 앞으론 더 잘 쓸 수 있었으면..

위에서도 말했지만 멜로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준 영화들 중 하나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사용하는 연출 방식들이 흔한 멜로 영화들과는 차별화되는 점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2020년에 한국에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 '조제'가 개봉됐는데, 원작을 본 사람들은 실망했다는 평이 많았다. 난 아직 안봤는데 아마 앞으로도 안 볼 듯... 원작이 너무 좋았다.

 

항상 그렇듯, 마지막으로 조제의 명대사 하나 남기고 리뷰를 마친다.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그 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 있을 뿐이지. 

언젠가 네가 떠나고 나면
길 잃은 조개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